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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은방>/상담 노트

[상담노트] 열매가 잘 보이지 않을 때라도

상담자로서의 약간의 '권태기' 같은 시기를
요즘 학교에서 보내고 있었던 것 같다.

숱한 노력을 쏟아도,
도저히 역부족이라 느껴지는 두어 아이를 만나며,
내 인생에서 일전에는 별로 느껴본 적 없던 '무력감' 같은 것을
근 두어달간 조금씩 조금씩 경험했었다.

솔직히 아직도 여기서 완전히 빠져나왔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상담자라는 역할이
결코 한 사람의 인생에서 그의 영웅도, 구원자도 될 수 없으며,
또 되려해서도 안된다는 것만은 철저히 깨달아가는 중이다.

'나를 비우는 시간'은
사람을 다루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반드시 필요한 시간이겠지만
쉽지 않고 힘들었다.

이런 시간들을 지난 터인지,
조금은 허전한 마음으로 앉아있던 오늘,
갑자기 두 졸업생이 학교 상담실로 찾아왔다.

작년에 고3일 적,
상담실을 찾아 꽤 여러차례 상담을 했던 친구들인데..
벌써 대학생이 되어 1학기를 종강했다고 하며 찾아온 것이다.
둘이 각자 따로 상담을 했었는데
알고보니 둘이 친한 친구사이였다.



돌이켜보니 이 친구들에게 내가 크게 한 역할은 없었다.
그냥 얘네가 인생의 어두운 시간을 보내는 순간들에
같이 있어주었고, 눈 맞춰주었고,
관심갖고 들어주었고..!
겨우 몇 살 더 산 인생선배로서 '어줍짢은' 조언들을 조금씩 해준 것 말고는.
'대단하다' 할 만한 역할은 정말 없었다.

그런데 이 아이들은
학교를 떠나고 첫 대학생 신고식을 마친 후 돌아온 고향에서,
편안한 고향같은 품같은 존재로 나를 기억해주었다는 것.
그들에겐 작을 지 모르지만 내게는 큰 감동이었다.

힘든 아이들을 줄줄이 만나고 조금 권태감에 젖어있던 나에게
하나님이 격려로 보내주신 선물같았고,
또 선명한 메시지 같았다.


'열매가 잘 보이지 않을 때라도
그때만이 끝이 아니란다.
그 아이들은 앞으로 계속 성장할 거고 자라갈 거야.
당장에 변화가 없고 결실이 없는 것 같아도..
지금 이 때 네가 부어준 관심과 사랑이
앞으로 아이들이 살아갈 인생에서는
무시할 수 없는 양질의 거름이 될 거란다.'


그래 맞다.
나는 왜 아이들 한 명 한 명을 대하면서
마치 얘들이 고등학교에서 모든 성장을 마쳐야하는 아이들인 것처럼
그런 큰 기대치로만 자꾸 바라봤을까.
그러고보면 나도 고등학교 땐 정말 아무 것도 모르고 이기적이고 어렸는데.
어쩌면 빨리 결실이 내 눈 앞에 보여야 만족하는 나의 성취지향적 욕심이었을지 모른다.


이 아이들도 커갈 것이다.
고등학교를 벗어난 이후에도,
내 눈에는 보이지 않아도 어디에선가 반드시.
조금씩 더 어른이 되어갈 것이다.

그저 변화와 성장이란
원래 눈에 쉽게 보이지 않을 뿐이다.
그래도 반드시 자랄 것이다.
마치 콩나물 시루에 물을 주듯.
당장은 아무 결실이 눈에 보이지 않을 때라도..
흠뻑 물을 먹다보면,
언젠가는 조금씩 조금씩 키가 자라있듯..!
사랑을 먹고 그 위에 시간을 먹으면 말이다.


시간의 연장선상에서 아이들을 바라볼 줄 아는 눈을 가져야겠다.
그들이 보여주는 반응과는 무관하게,
한결같이 사랑의 물을 주는 존재가 되어주고 싶다.
설리반 같은 선생님.
예수님 같은 사랑.
열매가 잘 보이지 않을 때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