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3:1-7 정승룡 목사님
예배, 그 모든 것의 새 출발입니다
에스라서의 전체 주제는 '약속을 반드시 이루시는 하나님'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해 하시는 말씀을 사람들은 듣지 않고 오히려 그를 가두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 대한 징계를 예언하셨지만 또한 그들을 회복시키실 것이란 약속도 주셨다 (렘29:14).
이 약속의 때가 차니 하나님은 이방 왕 고레스의 마음을 움직여서 이스라엘 백성을 돌아가도록 했다. 4만명 정도가 귀환을 했다. 처음 6달 동안에는 황폐해진 땅을 다시 가꾸고 살 수 있는 여건을 만들었지만 7째달 첫날에 전체를 모여 번제를 드렸다. 근데 왜 7째달이었는가?
이 7째달 첫날은 바벨론력에 의한 날이었지만 유대인력으로는 새해 첫날이었다. 이 유대인력의 새해 첫날은 출애굽하는 첫번째 날이었다. 유대민족의 새 역사가 기록되는 새출발의 날이었던 것이다. 새해 첫 날로부터 열흘 후(7월 10일)는 대 속죄일이다. 그리고 7월 15일은 초막절인 것이다.
이렇게 역사적인 새 출발이 있는 그날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배를 드림으로 새 출발을 하였다. 예배는 자신을 계시하신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이고 그 만남에 대한 인간의 인격적인 반응이다. 예배는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이다 -> 예배는 만남이다.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모습이 우리 인간 본연의 모습이다. 예배하는 가운데 하나님을,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다면 그것은 종교행위일 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참된 예배를 드릴 수 있을까?
1. 그리스도의 임재 가운데로 모여야 한다.
- "이스라엘 자손이 각자의 성읍에 살았더니 일곱째 달에 이르러 일제히 예루살렘에 모인지라(v.1)
- 히브리 문법적으로 이 '모인지라'는 그들이 스스로 모였지게 되었다는 의미이다.
- '일제히'의 히브리 원어를 보면 '한 사람처럼'이라는 의미이다. 하나님께서 이 날 사람들을 모으셨다.
- 참된 제사는 사람들이 스스로 모여질 때에 이루어진다. 예배란 억지로 동요해서 모이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스스로 모이는 것이다.
- 에클레시아 - 부르심을 받은 자들의 모임
- 교회는 방주다. 인간이 모인 교회는 당연히 '더러운', '인간적인' 모습이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기 때문에 거룩한 것이다. 현재만 유독 그런 것이 아니라 교회는 항상 지탄을 받아왔다. 인간들이 모인 곳이기 때문이다.
>> 모이기를 힘쓰는 것 vs. 세상에서의 일에 대한 균형은?
- 예배 가운데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간절히 기도해야 한다. 그럴 때 약속하신 말씀대로 찾고 찾는 자에게 자신을 나타내시는 하나님을 만날 것이다.
2. 하나님 말씀의 인도하심을 따라야 한다.
- "... 하나님의 사람 모세의 율법에 기록한 대로 번제를 그 위에서 드리려 할새" (v.2b)
- 초월하신 하나님을 만나는 이 예배는 하나님의 규레대로 행해져야 한다. 구약시대의 짐승을 잡아 죄를 전가함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처럼 오늘날 예수님의 피를 힘입어 하나님과의 회복을 도모하는 것이다. '신령'과 '진정'의 예배가 중요하다. (예: 아론의 아들들의 다른 불, 사울의 자신이 사무엘 대신에 드린 제사)
-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때 내 방법으로 드리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는 예배는 인간들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자기 우상숭배의 예배이다.
>> 하나님을 만났다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 그리스도의 임재가 우리와 하나님의 중재가 될 때에 비로소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영혼과 골수를 찔러 쪼개는 역사가 일어난다.
- 설교에는 항상 긴장이 있다. 우리가 천사가 아닌 죄된 인간이기 때문에 어느 한 부분은 (우리의 부족한 부분) 찔리는 부분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극단적으로 얘기해서 설교말씀 가운데 영적인 찔림이 없다면 그것은 종교행위이다.
3. 하나님을 향한 헌신의 응답이 있어야 한다.
- "... 모든 거룩한 절기의 번제와 사람이 여호와께 기쁘게 드리는 예물을 드리되"(v.5b)
- 예배의 이상적인 예는 이사야서에 나와 있다. 하나님을 만났을 때에 이사야는 입술이 부정하여 죽게 되었다고 절규할 때 하나님은 화두로 이사야의 입술을 정결케 하신다. 그 때 이사야는 하나님의 마음을 느낀다. 누가 나를 위해 갈꼬? 그러한 하나님의 마음에 이사야가 반응한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 이러한 '드림'은 하나님을 위해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드리는 것이다.
예배, 그 모든 것의 새 출발입니다
에스라서의 전체 주제는 '약속을 반드시 이루시는 하나님'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해 하시는 말씀을 사람들은 듣지 않고 오히려 그를 가두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 대한 징계를 예언하셨지만 또한 그들을 회복시키실 것이란 약속도 주셨다 (렘29:14).
이 약속의 때가 차니 하나님은 이방 왕 고레스의 마음을 움직여서 이스라엘 백성을 돌아가도록 했다. 4만명 정도가 귀환을 했다. 처음 6달 동안에는 황폐해진 땅을 다시 가꾸고 살 수 있는 여건을 만들었지만 7째달 첫날에 전체를 모여 번제를 드렸다. 근데 왜 7째달이었는가?
이 7째달 첫날은 바벨론력에 의한 날이었지만 유대인력으로는 새해 첫날이었다. 이 유대인력의 새해 첫날은 출애굽하는 첫번째 날이었다. 유대민족의 새 역사가 기록되는 새출발의 날이었던 것이다. 새해 첫 날로부터 열흘 후(7월 10일)는 대 속죄일이다. 그리고 7월 15일은 초막절인 것이다.
이렇게 역사적인 새 출발이 있는 그날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배를 드림으로 새 출발을 하였다. 예배는 자신을 계시하신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이고 그 만남에 대한 인간의 인격적인 반응이다. 예배는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이다 -> 예배는 만남이다.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모습이 우리 인간 본연의 모습이다. 예배하는 가운데 하나님을,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다면 그것은 종교행위일 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참된 예배를 드릴 수 있을까?
1. 그리스도의 임재 가운데로 모여야 한다.
- "이스라엘 자손이 각자의 성읍에 살았더니 일곱째 달에 이르러 일제히 예루살렘에 모인지라(v.1)
- 히브리 문법적으로 이 '모인지라'는 그들이 스스로 모였지게 되었다는 의미이다.
- '일제히'의 히브리 원어를 보면 '한 사람처럼'이라는 의미이다. 하나님께서 이 날 사람들을 모으셨다.
- 참된 제사는 사람들이 스스로 모여질 때에 이루어진다. 예배란 억지로 동요해서 모이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스스로 모이는 것이다.
- 에클레시아 - 부르심을 받은 자들의 모임
- 교회는 방주다. 인간이 모인 교회는 당연히 '더러운', '인간적인' 모습이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기 때문에 거룩한 것이다. 현재만 유독 그런 것이 아니라 교회는 항상 지탄을 받아왔다. 인간들이 모인 곳이기 때문이다.
>> 모이기를 힘쓰는 것 vs. 세상에서의 일에 대한 균형은?
- 예배 가운데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간절히 기도해야 한다. 그럴 때 약속하신 말씀대로 찾고 찾는 자에게 자신을 나타내시는 하나님을 만날 것이다.
2. 하나님 말씀의 인도하심을 따라야 한다.
- "... 하나님의 사람 모세의 율법에 기록한 대로 번제를 그 위에서 드리려 할새" (v.2b)
- 초월하신 하나님을 만나는 이 예배는 하나님의 규레대로 행해져야 한다. 구약시대의 짐승을 잡아 죄를 전가함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처럼 오늘날 예수님의 피를 힘입어 하나님과의 회복을 도모하는 것이다. '신령'과 '진정'의 예배가 중요하다. (예: 아론의 아들들의 다른 불, 사울의 자신이 사무엘 대신에 드린 제사)
-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때 내 방법으로 드리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는 예배는 인간들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자기 우상숭배의 예배이다.
>> 하나님을 만났다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 그리스도의 임재가 우리와 하나님의 중재가 될 때에 비로소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영혼과 골수를 찔러 쪼개는 역사가 일어난다.
- 설교에는 항상 긴장이 있다. 우리가 천사가 아닌 죄된 인간이기 때문에 어느 한 부분은 (우리의 부족한 부분) 찔리는 부분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극단적으로 얘기해서 설교말씀 가운데 영적인 찔림이 없다면 그것은 종교행위이다.
3. 하나님을 향한 헌신의 응답이 있어야 한다.
- "... 모든 거룩한 절기의 번제와 사람이 여호와께 기쁘게 드리는 예물을 드리되"(v.5b)
- 예배의 이상적인 예는 이사야서에 나와 있다. 하나님을 만났을 때에 이사야는 입술이 부정하여 죽게 되었다고 절규할 때 하나님은 화두로 이사야의 입술을 정결케 하신다. 그 때 이사야는 하나님의 마음을 느낀다. 누가 나를 위해 갈꼬? 그러한 하나님의 마음에 이사야가 반응한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 이러한 '드림'은 하나님을 위해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드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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