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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생각] 페미니즘과 성경해석에 대한 최근의 고민 정리

<20190212 생각 정리> 페미니즘과 성경해석에 대한 최근의 고민 정리


서론: 페미니즘과 성경해석에 대한 최근의 고민


한국사회에서 최근 페미니즘이 계속해서 뜨거운 이슈가 되고 있다. ‘동성애이슈만큼이나 페미니즘이슈에 대해서도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 간에는 상당히 과격한 공격이 오간다. 이 이슈와 그로 인해 최근에 하게 된 신앙적 고민에 대해 그동안 내가 가져온 경험과 입장, 그리고 앞으로 나아갈 바를 정리해보고자 한다.


본론: 이런 고민을 하기까지

나는 여성학과 페미니즘의 산실이라고 불린다는 이화여대를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페미니즘에 대해 개인적으로는 관심이 거의 없는 사람이었다. 솔직히 페미니즘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같은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일단 센 언니이미지가 떠올라 거북스러웠다. 무엇보다 자기 삶에 대한 불만과 남성 혐오적 사고를 삐뚤어진 방식으로 표현하고 강요하는 여성들이라는 선입견이 매우 강했다. 정의를 세우려한다는 미명 하에 사실은 또 다른 혐오(여혐과 다를 바 없는 남혐)를 원동력 삼아 움직이는 건강하지 않은 사람들로만 내 눈에 비춰졌다. 지금 돌아보면 그것은 페미니스트 중에서도 일부 집단에 국한되는 이야기인데 당시 나는 그것이 페미니스트의 전부인 것처럼 일반화했던 것이다.
그러던 내가 처음 페미니즘에 진지하게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웹툰 연재 중 나에게 구시대적 여성관을 가졌다는 식의 비판을 종종 남기는 일부 독자들의 댓글 때문이었다. 그 시기 다른 작가들의 작품에도(특히 결혼 생활을 그리는 일상툰일 경우 더더욱) 걸핏하면 페미니스트들의 무차별적인 댓글 공격이 쏟아지곤 했다. 솔직히 그때 기분은 내 가치관과 삶의 방식을 존중받지 못하고 역차별 당한 것 같은 느낌이 컸다. ‘조금 수동적 여성상으로 보일지는 몰라도 나는 이런 내 삶에 만족하는데 급진적 여성상을 주장하는 너희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왜 내가 틀렸다고 이렇게 공격받아야 해?’ 하는 거부감이 들었다고 할까. 역시 사람은 자신의 삶에 직접적으로 와 닿는 영향이 생길 때에야 비로소 어떤 이슈에 대해 진솔한 관심을 갖게 되는 가보다. 어쨌거나 그 일을 계기로 페미니즘에 대해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혹시 더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정도의 관심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페미니즘에 대해 적극적으로 공부하고 내 입장도 세워야겠다는 생각까지 나아가지는 못했다.
그러다가 몇 달 전 누가복음 뒷조사라는 책을 통해 페미니즘에 대한 관심을 좀 더 깊이 갖게 되었다. 예수님은 알고 보면 그 누구보다 앞장서서 시대의 편견과 제약에 도전하며 여성들을 한 인격체로 존중하고 세우셨던 그 시대의 가장 급진적인 페미니스트이셨다는 내용이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최근 페미니즘에 대해(더 정확하게는 성경적 여성관의 진실에 대해) 더 알고 싶다는 마음에 무작정 유튜브를 검색하다가 백소영 교수님의 페미니즘 강의를 듣게 되었는데 이 강의에서 페미니즘에 대한 나의 막연한 거부감이 깨지게 되었다. (백 교수님은 이화여대 재학 시절 내 베프 J가 가장 존경하고 따르던 멘토 교수님이시다. 친구로부터 백 교수님이 참 기독교인으로서의 삶을 진중하게 살아가려고 누구보다 애쓰는 분이라고 여러 번 들은 적이 있기에 조금 더 열린 마음으로 강연을 듣게 되었다.) 문학과 기독교사회윤리학을 전공한 사람으로서 인문학적이면서도 신학적으로 페미니즘이 무엇이며 현재 어디까지 와있는지, 그리고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할지를 간략하면서도 이해하기 쉽게 짚어주셔서 좋았는데, 특히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였다.

1) 첫째로, 성서라는 게 마치 베틀에 옷감 짜는 원리와도 같아 고정된 경줄과 그 위로 짜 내려가는 위줄이 함께 엮여있다는 것, 그래서 하나님의 참 본심과 명령에 해당하는 시대 문화를 초월한 보편적 메시지라고 할 수 있는 경줄은 문자 그대로 철저히 붙잡되, 시대 문화적 맥락과 제약 속에서 저자의 당시 언어로 표현되어진 면인 위줄은 문자 그대로가 아닌 그 아래 숨겨진 참 뜻을 이해하고 지금의 시대 문화적 맥락에 맞게 가져와야한다는 부분이었다. 이 말에 너무도 공감한 이유 중 하나는 성경을 문자 그대로만 보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너무도 이상하게 다가오는 부분들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대표적으로 바울은 성경에 마치 굉장히 여성차별적이고 여성혐오적인 사고관을 지닌 사람으로 비춰지지 않는가. 복음의 진수를 너무도 깊이 이해했던 그가 의도적으로 그랬다고 하기엔 의문이 가는 부분이 개인적으로도 많았었다. 2) 둘째로, 남성 중심적 사회에서 지배계급이 자신들의 논리를 타당화하기 위한 도구로 성경을 얼마나 쉽게 곡해하고 이용해 왔는가 하는 점이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이 아담을 창조하셨다고 할 때 우리는 아담을 당연히 남자라고만 생각해왔다. 가부장적 사회를 유지하려 했던 지배계급은 이런 류의 성경 구절들을 남자는 우월하며 여자는 더 열등하고 보조(도구)적인 존재에 불과하다는 주장의 근거로 늘 사용해왔다. 하지만 원래 이 아담의 히브리 원어는 남성이 아닌 그냥 사람이라고 한다. ‘여성’, ‘남성이라는 개념이 등장하는 것은 이 사람으로부터 하나님이 하와라는 여성을 만들어내시며 동시에 아담에게도 남성이라는 성이 부여되는 순간부터라고 한다. 이 점에서 돕는 배필이라는 개념도 사실은 공동체 관계가 된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해당되는 동일한 미션일지 모른다. 3) 또한 진정한 페미니즘은 살아라 페미니즘(내가 잘 사는 개인 중심적 페미니즘)’에만 멈추지 않고 살려라 페미니즘(함께 잘 사는 이타적, 희생적 페미니즘)’까지 포용하며 그 둘이 균형 있게 나아갈 때 건강하게 사회를 바꿔갈 수 있다는 부분에 매우 공감했다.

비슷한 맥락에서 최근 기독교 웹툰 사이트 에끌툰에서 연재 중인 비혼주의자 마리아라는 웹툰을 읽고 있다. 교회 안의 왜곡된 여성관에 의해 큰 상처를 받고 비혼주의자가 된 주인공 마리아가 바른 성서 해석 안에서 어떻게 다시 진정한 여성관을 회복해 가는지 그 과정을 다룬 작품이다. 아직 연재 초반부여서 문제 제기가 일어나는 단계까지만 진행되었고 본론은 모르지만 요즘 한창 고민하던 바울과 여성(성경적 여성관)’이란 주제에 대해 다루는 작품인지라 무척 흥미롭게 느껴졌다. 사람의 편의와 이기성에 의해 왜곡되어진 해석이 아닌 진짜 성경이 말하는 여성관에 대해 배워갈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페미니즘과 성경적 여성관에 대해 조금씩 알아가게 되자 내 안에 여러 의문이 풀려가는 것에서 오는 시원한 마음이 있었다. 하지만 한 편으로는 화와 두려움의 감정도 함께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여기서 라고 함은 기본적으로는 교회나 종교 조직에서 일어나고 있는 영적 폭력에 대한 화이자 동시에, 내 삶의 일부를 약간은 부정당하는 것 같은 회의감에 가까운 화였다. 내 안에서 하나님의 뜻이라는 이유(교회의 가르침) 하나 때문에 선뜻 반론조차 던져보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순응해보려고 애써왔던 삶의 방식 중 일부는 사실은 하나님의 명령이 아닌 사람에 의한 시대 문화적 명령이었던 부분들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동시에 나 역시도 사람의 명령을 마치 하나님의 명령인 것처럼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치고 강요했던 적이 있었던 것에 대한 부끄러움도 들었다. 더 나아가 이렇게 되기까지 성서를 치열하게 연구하고 바르게 가르쳐주지 못했던 지도자들에 대한 안타까움과 원망도 뒤섞였다. (-> 그로 인해 가장 측근의 사람들 여럿이 이단에 빠졌던 아픔도 있었기에.) ‘기독교, 그 위험한 사상의 역사라는 책에도 나오듯이 너무도 신실하신 우리 하나님의 본심이 이기적이고 욕망 가득한 존재인 사람에 의해 언제나 왜곡되어 가려지는 면이 있다는 점에 대한 안타까움 역시 강하게 올라왔다. 그리고 두려움이라고 함은 이 복잡한 성경을 앞으로는 어떻게 바르게 알고 적용하며 (또 다음세대들에게 바르게 가르치며) 살아갈 수 있을까에 대한 막막함, 이에 더해 이런 회의감이나 화가 자칫 균형을 잃은 극단적 자유주의 신학으로까지 너무 나가버리지 않도록 주의해야겠다는 경각심이었던 것 같다.


결론: 앞으로 어디로, 어떻게 나아가야 할까

이런 생각과 감정들을 앞으로 주님 안에서 어떻게 풀어가야 할까. 이것이 지금 나의 고민 지점이다. 기도하며 드는 몇 가지 생각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1) 먼저는 무엇보다 성경 안에 담긴 하나님의 본심을 바르게알기 위해 나부터가 최대한 힘쓰려 한다.
여기서 성경을 바르게 안다는 것은 성경 텍스트 자체보다 그 속에 담긴 하나님의 본심을 시대 문화적 표현의 한계를 뛰어넘어 있는 그대로보려고 애쓴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경이 성령의 감동으로 쓰여 졌다는 점은 자명하지만, 성경이 사람들을 통로 삼아 쓰여 졌다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성경을 쓴 사람들은 많은 경우 자신들이 몸담고 있던 시대 문화적 틀 안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감동을 표현했다. 예를 들어 어릴 때부터 스마트폰을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데에 익숙한 지금의 어린이들에게 삐삐나 유선전화 시절의 소통방식을 이해시키려면 상당히 노력이 필요한 것처럼 우리와 다른 시대문화 속에서 쓰인 성경을 읽을 때 우리가 괴리감을 느끼는 것도 비슷한 원리일 것이다. 다시 말해 성경은 역사책이며, 역사 공부를 할 때처럼 그 시대와 문화 속으로 들어가서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2) 나를 움직이는 원동력이 미움(혐오의 반작용)이 아닌 사랑(긍휼)인지를 늘 점검하려 한다.
가장 정의로워 보이는 사람이 때로는 가장 무섭고 해악한 사람이 될 수도 있다. 정의를 향한 그 사람의 몸부림이 상대를 향한 안타까움과 긍휼보다는 원망과 분노에 의해 움직이고 있을 때가 그렇다. 예를 들어, 어린 시절 남성에 의해 성폭력을 당했거나 굉장히 가부장적인 아버지의 횡포 아래에서 자란 여성들 중에 굉장히 급진적인 페미니스트가 되거나 극단적인 동성애 운동가가 되는 경우가 상당히 있다. 하지만 더 나은 사회를 만들겠다는 명목 하에 사실은 기저에 남성에 대한 혐오감과 거부감이 그들을 움직이는 추동으로 작용하고 있다면, 결론적으로 그 운동은 (나와 다른 상대나 그룹에 대한) 또 다른 폭력을 열매를 낳을 수밖에 없게 된다.

3) 사람의 불완전함을 수용하자.
가끔 과거에 조직(종교단체)의 유지나 이익을 위해 내가 도구처럼 이용당한 적이 있다는 생각이 들 때면 서글퍼질 때가 있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일부 선교 단체나 교회들에서 상대방을 두렵게 하여 사람의 명령()을 마치 하나님의 명령()인 것처럼 주입하는 영적 폭력은 정말 위험하다. 하지만 설령 과거에 누군가 나에게 정말 그랬다고 한들, 그 사람들 역시 대부분은 악의보다는 무지함속에서 그렇게 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입장을 바꾸면 나 역시도 남에게 본의 아니게 영적 폭력을 휘둘렀던 순간들이 없지 않았음을 자각한다. 하지만 당시에는 그것이 정말 하나님을 위한 열심이라고 철석같이 믿었다. 마치 사도바울이 회심 전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자들을 특출한 열심으로 쫓아다니면서도 그것이 하나님을 위한 일이라고 철석같이 믿었듯이 말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바울의 그 불완전한 행위자체보다 주님을 향한 진심을 보고 강권적으로 회심의 전환점을 마련해주지 않으셨던가. 지금까지의 내 신앙여정도 그러했다. 주님께서 여러 차례 회심점을 만들어주셨고 지금도 또하나의 그런 지점을 만들어주고 계신 것 같다. 우리 인간은 모두가 불완전하다. 하지만 그 불완전성에도 불구하고 완전하신 하나님을 평생 알아가는 존재이고, 그래서 겸손하게 성령님의 이끄심을 늘 구해야 하는 것이다. 다른 이의 리더십에 상처가 있었다면 그것을 원망하며 과거에 발목 잡히기보다는, 반면교사 삼아 바른 리더가 되기 위한 좋은 배움이자 원동력으로 승화하자 다짐해본다.

4)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 뿐 아니라 선하신성품을 늘 기억하자.
지나온 내 삶의 시행착오와 실수들도 사실은 하나님의 선하신 통제안에 있었다는 사실을 믿느냐 아니냐가 절체절명의 순간에 큰 갈림길이 되는 것 같다. 내가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의도적으로 거부하지 않는 이상, 내 안에 주인으로 임재 해 계시는 하나님은 지나온 모든 과거도, 넘어지고 일어나는 현재의 모든 고민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가신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렇게 인도 해 가실 것이다. 지금까지의 인류 역사만 봐도 그렇지 않았던가. 성경은 비겁한 사기꾼(야곱), 살인자(다윗), 기생(라합) 등 인간적으로만 보자면 한없이 찌질하고 불완전한 자들을 통해 어떻게 완전하신 하나님의 구속 역사를 그럼에도 불구하고선하게 이루어 오셨는지를 기록한 이야기이다. 인간의 불완전함에만 집중하면 절망과 무기력 밖에 없다. 하지만 눈을 들어 그 모든 한계를 뛰어넘어 일하시는 하나님을 볼 때 다시 걸음을 디뎌 볼 용기를 얻는다. 잠시 주저앉아있었다면 일어나자. 옷에 묻은 먼지를 훌훌 털고 다시 걷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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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자료 공유

 

https://www.youtube.com/results?search_query=%EB%B0%B1%EC%86%8C%EC%98%81+%ED%8E%98%EB%AF%B8%EB%8B%88%EC%A6%98&sp=mAE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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