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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은방>/생각방

[S.E생각] #1. ‘소명’의 정의 #2. 타협하지 않아야 할 시간

# 소명의 정의

‘진로’라는 화두는 어쩌면 우리에게 평생의 이슈일 것이다.
중고등학생에겐 대입이,
대졸자에겐 취업이,
직장인에게는 직장이나 직업 자체의 유지 여부
(이직, 직업 전향 등의 다양한 문제)가,
은퇴를 앞두고는 노후의 삶이..!
계속해서 ‘방향과 선택’의 문제를 마주하게 되는 게 우리 삶이다.

일반적으로 일반 청소년들에게 ‘진로’ 선택의 기준은,
*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것
*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
* 가장 몰입할 수 있는 것(가치를 느끼는 것)
-> 종합적으로, ‘내가 가진 자원을 활용해 세상에서 최대로 성공할 수 있는 것’
이라고 압축되는 것 같아 보였다.
그러다가 최근에 와서는,
청년들처럼 직업 안정성을 일찍부터 기준으로 삼는 청소년들도 많아지고 있다.
(Ex. 대입 대신 일찍이 공무원 시험 준비하는 사례 등)


그리고 현실성에 좀더 눈뜨는 청년(대졸자)들에게 진로 선택의 기준은,
* 직업 안정성(한번 들어가면 안 짤리고 정년 보장이 되는지)
* 사내 복지(너무 안 들볶이고 개인 삶도 존중받으며 일 할 수 있는지)
* 급여 수준(돈 많이 주는지)
순서라고 한다.


이런 사회분위기 속에서,
우리 크리스찬에게 진로 선택의 기준은
‘내가 받은 은사와 재능을 통해 하나님을 가장 잘 나타낼 수 있는 것’.​
= 그것이 곧 소명
이라는 글을 읽었을 때,
내 속에 많은 생각이 스쳐지나갔던 것 같다.
‘정말 이 기준으로 진로를 택하는 젊은이들이 우리나라에 얼마나 될까..?’ 부터 시작해서..


성경에 나오는 아브라함과 롯 이야기가 생각이 났다.
두 종류의 땅 중 어느 곳을 선택할까의 문제를 두고,
롯은 겉으로 보기에 비옥하고 편안해보이는 ‘소돔과 고모라’ 땅을 택했고,
아브라함은 롯이 택하고 남은 땅을 택했다.
하지만 아브라함이 택한 그 땅은 비록 척박해보일지라도
하나님의 약속이 있는 땅이었다.

결국 세상의 기준으로만 진로를 택했던 롯은,
그 화려한 조건들이 오히려 올무가 되어 타락한
소돔과 고모라 땅의 멸망을 보며 도망쳐야했고,
사위들과 이웃들은 모두 죽고,
두 딸과 함께 동굴에 피신하여 겨우 명맥을 잇는 신세가 되고만다.

반대로 아브라함은,
비록 자원도 별로 없고 세상적 눈으로는 매력이 그닥 없어보이는 진로로 가게 됐을지 모르지만,
그를 향하신 하나님의 섭리와 뜻하심이 있는 길을 택했고,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며 ‘동행함’의 길을 걸은 결과로,
‘믿음의 조상’으로 불리우게 되는 은혜를 입었다.


‘안정성’만을 앞세워 획일적인 진로선택을 하고 있는
요즘 학생들의 세태가 안타깝다.
(물론 분명한 이유의 사명감을 갖고 가는 사람이라면 상관 없지만)
사회적 지위 또는 평생 직장을 보장해준다는 이유하나로
특정 진로나 직업을 택하고 있는 한국사회의 분위기.
여기에는 사회 구조의 문제도 큰 몫을 하지만,
사회구조는 결국 사회구성원들의 의식과 마음가짐이 모여 만들어지는 것이기에,
경제가 어려워진다고 해서 그럴수록 ‘더 눈에 보이는 것’으로만 안정감을 얻으며
개인의 안위에만 치중하려는 사회 구성원들이 많아질수록
사회구조문제는 앞으로 점점 더 악화될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라가 있어야 국민도 있고,
사회가 바로잡혀야 사회구성원도 자연스럽게 행복할 수 있는 것인데...!)


적어도 크리스찬 학생들과 젊은이들만큼은,
소명에 대한 성경적인 분명한 정의를 갖고,
‘비록 시작은 척박해보일지라도 그 위에 하나님의 약속이 있는 어떤 길’
로도 필요하다면 주저없이 내딛는 도전을 할 수 있기를..!
그리고, 개인 안위를 넘어선 사회와 국가에 대해서도
심각한 책임의식을 갖고 기도함으로 진로를 택할 수 있기를..!

(​‘이 시대, 이 나라, 이 사회에 태어나 살아가고 있는 내가,
이곳에 하나님의 통치를 더 나타내기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것이 나를 비롯한 우리 크리스찬 젊은이들의 고민이 되어야 하는 것 같다.)





# 타협하지 않아야 할 시간

루터를 비롯하여..
위대한 하나님의 일꾼이었던 사람들은 모두 공통적으로,
삶에서 2시간 이상씩의 retreat(말씀묵상과 집중적인 기도의) 시간을 꼭 확보하며 살았다.

그들은 대체로, 눈코 뜰새 없이 바쁘게,
수많은 일들을 동시다발적으로 감당해야하는 사명 속에 있었지만,
그런 시기일수록 더더욱 분주함에 잠식당하지 않기 위한 유일한 방법으로서,
그리고 그 모든 복잡한 문제들을 풀어갈 힘과 지혜를 공급받는 시간으로서
매일 리트릿의 시간을 의지적으로 확보했고,
이 시간만큼은 그 어떤 일정에도 타협하지 않았다고 한다.

상반기에 나 자신이 정말 하루살이 같이 느껴지는 직장생활을 했었다.
그때, 몸과 마음이 피곤하다는 핑계로,
말씀생활은 형식으로만 남고
진중한 기도생활은 더더욱 내 삶의 자리로부터 떠나가버렸던 것 같다.
그렇게 사는 삶이 쌓이고 쌓이자,
내 마음을 불평과 분노로 사로잡으며 전쟁터로 만들려는 사단에게 침공당하지 않을 수 없었고,
결국 사단만 쾌재를 부르고마는 결과로 끝나게 되었던 것 같다.

객관적으로 척박했던 상황 그 자체보다는,
전쟁터 속의 비밀한 작전지휘소 같은 공간을 점렴 당해버렸던..
그것이 어쩌면
상반기를 그렇게 보내게 되었던 유일한 원인이 아니었을까 하는 진단을 내려본다.


다음 단계에 내가 어디에서 어떤 모습으로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지 아직 모르지만,
그 삶의 자리에서, 이 작전지휘소 같은 ‘리트릿’ 시간만큼은 절대 놓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하게 되는 요즘이다.
그리고 그 습관을, 시간적 심적 여유가 많게 지내고 있는 지금부터
잘~ 형성해두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하고 있다.
(지금도 못하면 진짜 바쁠 땐 어떻게 하겠어 하는 마음으로.. 경각심을 가지며..!)